역사이야기/건국~발해

[스크랩]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 삼한시대(마한,진한, 변한)이야기..

정현배 2017. 10. 16. 20:57

1. 삼한시대 때에 최강부족 마한(馬韓)..
     
한국 고대사에서 삼한(마한, 진한, 변한)의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고려때 신라계인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 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발굴된 그 지역의 유적에 특징을 분류하고, 주변국(옛 중국)에 문헌을 참조하여 당시를 추증할 수 밖에 없다.


삼한의 영역을 좀 더 세밀히 말하면 한강 이남지역을 말한다. 경기남부지역과 충청도와 강원도 서, 남부지역, 경상도와 전라도지역이다.


지금의 한반도 전체를 두고는 "삼한"이라는 말을 하면 안된다. 당시(BC 2C ~ AD 3C)  한반도에는 많은 나라(부족국가 형태)들이 새로 생기고, 때로는 힘있는 나라에 병합되어 갔다. 
     
마한의 원주민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이루었고, 목지국(目支國: 직산, 성환, 아산 일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국(부족)연맹의 형태를 유지했다고 보여 진다. 실제 마한지역 소국 중에는 백제국처럼 북방계 유이민(遺移民)의 정착을 계기로 하여 형성된 집단도 있고,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되는 집단도 있어 그 형성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일부 후대 기록에서는 기원전 2세기 초에 기자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을 피하여 바닷길로 달아나 “월지국(月支國 = 목지국)을 세웠다.” 라는 견해가 있다. 
     
목지국(目支國)의 현재의 위치는 충청남도 직산·성환·아산만 일대 또는 공주, 전라북도 익산 등지에 예상하고 있으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직산지역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목지국이 언제부터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지에는 진·변한 24국 중 12국이 목지국진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진왕이 진·변한의 일부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재든 마한은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부터 한반도에 한강 남쪽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부족 집단이었고, 그렇게 모인 54개 부족의 (공동)집단의 통칭을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기원전 1C경 마한은 새로 생긴 북쪽에서 내려 온 세력에 의해 한강 유역(현재 경기도 하남시와 서울특별시 강동구·송파구 등 한강 남쪽)을 내어주고 경기도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북쪽에서 내려 온 강력한 세력이 바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인 것이다. 
   

    삼한시대 때 한반도 일대 지도       


  
마한의 강역(疆域)은 북쪽으로는 한강 유역에 자리를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온조(溫祚)세력이, 더 북쪽에는 대방과 동예(東濊)가 있었다. 마한의 서쪽은 서해에 접했고, 동쪽(낙동강 동쪽)은 진한(辰韓)이, 남동쪽(낙동강 서쪽과 지리산 일 때)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처음에 한강 이남인 서울남동부를 중심으로 성장한 54개 부족들이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내려온 다수에 세력으로 인해 마한 연합 부족은 한강유역을 저버려두고 현제 경기도 남쪽과 충북, 충남, 전북, 전남에 특히, 충남 직산을 중심도읍으로 54개 부족들을 공통으로 마한이라 불렀다. 그들은 당시 한반도의 중, 남쪽 지역에 주인이었다. 크게 번성할 때는 강원도 서쪽지역과 황해도 남쪽까지 그들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하지만 북에서 내려 온 온조(백제)의 세력에 조금씩 그들의 세력도 약해져 갔다.  
     
마한사람들은 농업을 중요시 하였다. 이와 더불어 마한지역에서는 그 당시 한반도 동남부 변한이나 낙동강 동쪽에 있는 진한의 초기 철기시대(세형동검문화단계) 유물과 비교해 청동기 유물이 월등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의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 용범(鎔范)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위서(魏書: 조조의 나라에서 지은 역사책) 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부족(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거돼 있다. 
     
큰 부족은 약 1만여 가구(家具), 작은 부족은 수천 가구(家具)였다고 한다. 규모가 큰 부족의 지배자는 ‘신지(臣智)’라고 하였고, 작은 부족의 우두머리를 ‘읍차(邑借)’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 현제 충남 천안시 직산면)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했다. 삼한의 초기에는 마한의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마한은 진한과 변한의 왕에게 맹주대접을 받았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부족은 4~5천 호였고, 작은 부족은 약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扶餘族)계통인 온조(溫祚)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이 마한 연맹체를 통일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은 기원 후 8년에 온조왕이 다스리는 백제에 병합되었고, 9년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1년 고구려 6대 왕인 태조대왕이 한사군 중 현토성과 요동 공격 때에 마한의 군사들도 같이 동원한 기록도 있다. 이는 온조왕 때에 백제가 마한의 부족국가 연맹체를 해체·흡수한 것이 아니라 목지국을 대체할 연맹체 내의 우두머리 국가로 부상하였고, 한반도 북쪽에도 마한의 세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마한의 멸망
    

백제국이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때가 고이왕(古爾王: 백제 제8대 왕, 234년 ~ 286년, 재위기간 52년) 시기부터 마한의 중심 세력이 목지국에서 백제국으로 이동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후에도 마한의 일부 세력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명맥을 유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백제의 최강 시대를 연 근초고왕(近肖古王: 백제 13대 왕, 285년 ~ 375년, 재위기간 약 11년) 때 마한이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본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은 369년 백제국과 연합해 한반도 남부를 정복하고 그 땅을 백제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는 정황 상 일본이 주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마한 전체를 통일한 기록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한사람들은 부복들이 모여 살았지만 성곽을 축종하지 않았으며 없으며, 활, 방패, 창 등을 잘 다루었다. 그리고 청동기 유물을 풍부하게 활용하였고, 집은 초가지붕에 흙으로 벽을 세웠으며, 문을 윗쪽으로 내었다. 옥(玉)을 좋아하였지만, 금과 은.. 등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농업과 잠업(蠶業)에 힘썼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馬韓)의 54개 연합소국(聯合小國)
     
1.감해국(感奚國), 2.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3.건마국(乾馬國), 4.고랍국(古臘國), 
5.고리국(古離國), 6.고비리국(古卑離國), 7.고원국(古爰國), 8.고탄자국(古誕者國)
9.고포국(古蒲國), 10.구로국(狗盧國), 11.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12.구소국(狗素國)
13.구해국(狗奚國), 14.내비리국(內卑離國), 15.노람국(怒藍國), 16.대석삭국(大石索國)
17.막로국(莫盧國), 18.만로국(萬盧國), 19.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20.모수국(牟水國)
21.목지국(目支國), 22.백제국(伯濟國), 23.벽비리국(辟卑離國), 24.불미국(不彌國)
25.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26.불운국(不雲國), 27.비리국(卑離國), 28.비미국(卑彌國)
29.사로국(駟盧國), 30.상외국(桑外國), 31.소석삭국(小石索國), 32.소위건국(素謂乾國)
33.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34.신분활국(臣濆活國), 35.신소도국(臣蘇塗國), 
36.신운신국(臣雲新國), 37.신흔국(臣國), 38.아림국(兒林國), 39.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40.염로국(冉路國), 41.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42.원양국(爰襄國), 43.원지국(爰池國)
44.일난국(一難國), 45.일리국(一離國), 46.일화국(日華國), 47.임소반국(臨素半國)
48.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49.지반국(支半國), 50.지침국(支侵國), 51.첩로국(捷盧國)
52.초리국(楚離國), 53.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54.치리국국(致利鞠國)
     
청주 한씨 계보도에 기록된 마한 왕계보도..(일반적으로 이러한 족보 속의 왕계보는 숭조사업의 일환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아 실제 역사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냥 참고용으로 보면 좋다.)
     
1  무강왕(武康王), 애왕(哀王),   한준(韓準)      B.C ?년~B.C 193년    기자조선 마지막 왕, 월지국의 초대왕
2  강왕(康王)       한탁(韓卓)     B.C 193년~B.C 189년  
3  안왕(安王)  한감(韓龕)     B.C 189년~B.C 157년  
4  혜왕(惠王)  한식(韓寔)     B.C 157년~B.C 144년  
5  명왕(明王)  한무(韓武)     B.C 144년~B.C 113년  
6  효왕(孝王)  한형(韓亨)     B.C 113년~B.C 73년  
7  양왕(襄王)  한섭(韓燮)     B.C 73년~B.C 58년  
8  원왕(元王)  한훈(韓勳)     B.C 58년~B.C 33년  
9  계왕(稽王)  한정(韓貞)  B.C 33년~B.C 17년  
     
    

2. 가야국(伽倻國)의 원조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

     
기원전 108년 고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하였을 때 부터 지금 한반도의 한강 이남지역과 남부지방에는 기원후 300년까지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는 큰 부족연맹이 있었다. 이들은  서기 300년까지 지속되었다.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진한지역, 남서쪽은 변한지역으로  서로 섞여 살았다. "고 한다. 
     
변한에는 12개의 부족(소국)과 여러 소별읍(小別邑)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구야국(김해). 안야국(함안), 고자국(고성), 반로국(고령)이 나름 큰 부족들이었다.  
     
이들은 구야국(김해)를 중심으로  훗날 이들은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소가야(고성), 대가야(고령)로 성장 발전한다.
     
 변진(변한)은 진한과 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언어나 법속 등이 모두 진한과 비슷하여 특별히 구분되지 않았다고 하며, 제사지내는 풍습만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고고학 발굴 결과에서도 변한과 진한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낙동강 하구 지역에서 양질의 철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마한과 동예(東濊: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지역), 왜(倭), 한사군(중국 요서지역) 등에 수출하였다. 
     
- 이 시기에는 중국 한나라의 문화 영향으로 한반도에도 철기문화의 보급이 가속화되어 본격적으로 철이 사용된다. 또한 철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원전 39년 봄 정월에 변한이 신라(혁거세 거서간 통치 시)에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는 기록이 있으나 조선말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이는 "당시 진한(사로 6부족)의 국력으로 볼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 했다..
    

     
변한(弁韓) 12개국..
     
삼국지 위서 제30권 오환선비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이 변한을 언급하고 있다.
     
“有, 已柢國, 不斯國, 弁辰 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勤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冉奚國, 弁辰半路國, 弁樂奴國, 軍彌國, 弁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 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 弁辰安邪國, 馬延國, 弁辰瀆盧國, 斯盧國, 優由國, 弁辰韓合二十四國"
     
1.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 밀양시 일대
2. 첩도국 (接塗國): 함안군 칠원면 일대
3.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성일대
4. 고순시국(古淳是國): 사천일대
5. 감로국(甘路國): 경북 김천시 개로면 일대
6. 악노국(樂奴國): 하동군 악양면 일대
7. 군미국(軍彌國): 사천군 곤양면과 곤명면일대.
8. 미오사마국(彌烏邪馬國):창원시 일대
9. 구야국(狗邪國): 김해시 일대
10. 주조마국(走漕馬國): 경북 김천 조야면 일대
11. 안야국(安邪國): 함안군 일대 
12.독로국(瀆盧國): 부산시 동래구 일대
     
포털 다음에서 스토리펀딩에 " 설화 그 원석을 캐다" 15화에 마한의 왕자와 변한의 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그들이 머문 지리산 골짜기에는 여러 이름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왔다. 그 이야기를 여기에 담아 보고자 한다.
     
     
지리산 골짜기 명칭에 관하여...
     
삼한시대 "마한의 다로왕자와 변한의 상아공주 이야기"  by 허석..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나라 한강 이남지역에는  부족 연합체인 삼한이 있었다. 마한, 진한, 변한이 그것이다. 
     
삼한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는데, 마한의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에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됐다. 그래서 마한의 왕이 삼한을 대표하는 진왕(辰王)이 되어 느슨한 연합체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후한서(後漢書) 한전(韓傳)에는 "마한이 가장 강대하며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세기 중엽, 마한의 왕에게 다로라는 왕자가 있었다. 
목지국 왕이 마한의 왕이었고, 마한의 왕이 삼한의 형식적인 대표인 진왕이 되었기에 다로왕자도 머지않아 진왕이 될 것이었다. 
     
목지국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충남 천안의 직산이었다. 다로 왕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지금의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변한지역)를 여행하는 일이 많았다.
     
다로왕자가 마한과 진한과 변한의 경계지역인 지금의 산청 근처를 지나다 상아라는 아가씨와 우연히 만났다.
     
알고 보니 상아는 변한의 공주였다. 
상아공주 역시 삼한의 경계지역이자 장시(場市)가 활발하게 열려 사람들로 북적대는 산청으로 나들이를 왔던 것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다로왕자와 상아공주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물론 다로왕자는 자신이 목지국의 왕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다로왕자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후일을 기약하고 아쉬운 이별을 한 두 사람은 돌아가서도 내내 서로를 그리워하였다. 
     
다로왕자는 부왕에게 아뢰어 변한의 상아공주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상아공주 역시 허락하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목지국으로 다로왕자를 찾아갈 각오까지 하였다. 그래서 단단히 결심을 하고는 부왕을 찾아갔는데 때가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마한에서 조공을 미루는 자국인 변한을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들어온 것이다.
     
변한 조정에서는 맞서 싸우자는 강경파와 항복을 하자는 온건파가 대립을 하였다. 결국 원로 중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상아공주는 말 한마디 꺼내지도 못한 채 부왕을 따라 지리산으로 피신을 하였다. 지리산 깊은 곳으로 피신한 변한의 신료들은 서둘러 임시 궁궐을 지었다.
     
비록 허름하게 지은 임시 궁궐이기는 하지만, 달처럼 예쁘다 해서 달궁이라 불렀다.
     
변한 왕은 자신이 있는 지리산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달궁 중심으로 서쪽 10리 밖에 있는 고개[嶺]에 정장군을, 동쪽 20리 밖에는 황장군을, 또한 남쪽 20리 밖에는 성(姓)이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북쪽 30리 밖의 높은 고개(령)에는 용맹한 8명의 젊은 장군을 배치하였다.
     
그즈음 마한 목지국에서는 변한이 지리산으로 피해 전쟁에 대비하고 있다는 말에 변한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한에는 목지국을 비롯하여 54개의 부족(소국)이 있었으니 연락을 취하는 데도 한 달 가까이 걸렸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하려면 군량미도 충분히 준비를 해야 하기에 각 씨족과 부족에 군량미를 할당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은 더욱 큰일이었다.
     
그때 다로왕자가 자신을 변한에 사신으로 보내달라고, 부왕에게 간청하였다. 부왕 역시 전쟁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판단하여 수락하였다. 수소문을 한 끝에 다로왕자는 변한의 왕과 중신들이 피신해 있다는 달궁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다로왕자는 달궁 근처도 못가서 사로잡히고 말았다. 자신이 목지국(마한)의 왕자라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산청에서 다로왕자를 본 적이 있는 젊은 장수 덕분에 다로왕자는 달궁으로 가서 변한의 왕을 만나게 되었다.
     
조공에 관한 조정안을 낸 다로왕자는 “마한과 변한 두 나라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자신과 상아공주가 혼인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다로왕자와 상아공주가 각국의 왕실과 백성들로부터 축복 속에 혼인을 하였다. 두 나라는 전쟁 직전까지 갔던  사이에서 이제부터는 오랫동안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지속되었다.
     
다로왕자는 훗날 삼진(三辰: 마한,진한, 변한)의 진왕이 되었고, 상아공주는 진왕의 왕비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지리산에는 짓자 마자 쓸모가 없게 된 달궁은 시간이 지나 폐허가 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이름만 전해 내려올 뿐(달궁계곡) 옛 궁궐터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달궁을 방어하기 위해 서쪽에 정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서쪽 고개를 정령재, 동쪽에 황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동쪽 고개를 황령재, 남쪽에 세 명의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남쪽 고개를 성삼재, 북쪽에 여덟 명의 젊은 장군이 배치되었다고 해서 북쪽 고개를 팔랑재라 부른다고 한다. 이들 고개와 골짜기의 이름이 이렇게 해서 생겼다고 한다.
     
(이글을 적은이는 변한을 진한으로 적고 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즉, 낙동강 동쪽을 진한지역이고 낙동강 서쪽과 남족 지역을 변한지역이라고 봤을 때 지리산은 낙동강 서남쪽에 있기에 진한은 아니라고 봐서 변한으로 고쳤다.) 
    

     
3. 한반도 동쪽 끝 진한(辰韓) 
     
진한(辰韓)은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낙동강 동쪽 지역으로 보면 된다. 그 끝은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한(馬韓), 낙동강 남서쪽은 변한(弁韓),  북쪽으로는 동예에 접하고 있다. 모두 12개의 부족연맹체로  되어 있었으며,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사로 6부족(알천양산촌= 경주 이씨, 돌산고허촌=경주 최씨, 경주 강씨, 무산대수촌=경주 손씨, 취산진지촌=경주 정씨, 금산가리촌=경주 배씨, 명활산고야촌=경주 설씨)들이 발전하여 신라(新羅)의 모체가 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진한(辰韓)에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첫번째는  중국 진(秦)나라 때 부역을 피해서 온 난민 형태의 중국 전국계(戰國系) 유민과 진나라 망한 후 한나라(한무제) 때 요서와 요동지역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의 압력을 피해 온 유민들로 크게 두부류로 나누워져 마한에서 동쪽의 땅을 분할하여 살게 하였다고 한다. 
     
초기에는 6국이었으나 점차 12국으로 나누어졌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불합리한 전승으로, 고조선 유민 또는 온조(溫祚) 집단의 남주 정착 과정을 반영하는 기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한 지역과는 달리 경상도 지방에서는 전체적으로 위씨조선계(衛氏朝鮮系) 청동기·철기문화의 유입, 한(漢) 철기문화의 보급에 수반한 금속제 유물의 수량이 현저하게 증가된다.
     
다량의 금속기를 소유한 지배자의 출현은 정치집단의 대두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진한 소국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경주·대구 지역에서는 위씨조선계 금속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다량의 청동기·철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같은 고고학 자료를 놓고 본다면 혁거세(赫居世) 집단의 대두와 6촌(六村) 통합에 관한 문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위씨조선계 주민과 문화의 유입을 계기로 청동기문화 단계의 토착 세력 집단들이 다수 통합되면서 《삼국지》의 진한사로국으로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리고 청동기· 철기 교역을 통하여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던 일정한 세력권을 상정하고, 이를 진한 소국 연맹체 형성의 실마리로 간주한다면, 진(秦)의 망명인들이 진한 형성의 주체가 되었다는 《삼국지》의 기록도, 넓은 의미에서 위씨조선계 유민의 경상도 방면 이주와 이에 따른 이 지역의 정치·경제적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소국 연맹체로서 진한의 실체가 확립되는 것은 이 단계부터 내재하던 경주·대구 중심의 세력 토대가 12국으로 확대 발전되고 사로국 중심의 정치적·경제적인 종연맹조직이 성립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위략 魏略》의 기사에 나오는 왕망(王莽) 지황연간(地皇年間, 20∼30)에 낙랑군에 조공하였다는 진한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鑡)는, 12개 소국 연맹체로서의 진한이 아니라 경주·대구 세력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유력한 소국의 신지(臣智)로 간주된다.
     
《진서 晉書》에 의하면 진한 소국 연맹체는 서기 280년, 281년, 286년 세 차례에 걸쳐 ‘진한’의 이름으로 중국 진(晉)에 견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원거리 교역의 실시는 진한 소국 연맹체의 결속력과 조직력이 3세기 말경에는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진한의 이름으로 대외통교를 전개하고 있던 진한 소국의 대부분은 신라 국가의 기본세력으로 편제되어갔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창녕의 소국(불사국 또는 난미리미동국에 비정됨)과 같이 3, 4세기 이후 진한 연맹체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가야 소국으로 발전한 것도 있는 듯하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12개의 소국 중 큰 나라는 5 ~ 6천 가구 작은 나라는 6 ~ 7백 가구라 하였다.
     
1.  사로국(斯盧國)
2.  기저국(己柢國)
3.  불사국(不斯國)
4.  근기국(勤耆國)
5.  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
6.  염해국(冉奚國)
7.  군미국(軍彌國)
8.  여담국(如湛國)
9.  호로국(戶路國)
10.주선국(州鮮國)
11. 마연국(馬延國)
12.우유국(優由國)
     
그밖에 소국들..
     
13.감문국
14.골벌국
15.다벌국
16.비지국 
17.소문국 
18.실직곡국
20.음즙벌국 
21:초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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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때 집필된《삼국지 :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중 동이전(東夷傳)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各有長帥,大者自名爲臣智,其次爲邑借,散在山海間,無城郭。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國、臣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 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 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路國、兒林國 , 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卑離國 , 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支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한(韓)은 대방(帶方) 남쪽에 있고 동서간으로 바다에 막혀 있다. 남쪽으로 왜(倭)와 접하고 사방 4천리다.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세 종류가 있다. 진한(辰韓)은 예전의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그 백성은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데 누에 치는 법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든다. 각각 우두머리(長帥)가 있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성곽(城郭)이 없다. 원양국, 모수국, 상외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 신분고국(臣沽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부사국, 일화국, 고탄자국, 고리국, 노남국, 월지국(月支國), 자리모로국, 소위건국, 고원국, 막로국, 비리국, 점리비국, 신흔국, 지침국, 구로국, 비미국, 감해비리국, 고포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 내비리국, 감해국, 만로국, 피비리국, 구사오단국, 일리국, 불미국, 지반국, 구소국, 첩로국, 모로비리국, 신소도국, 막로국, 고랍국, 임소반국,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 초산도비리국, 일난국, 구해국, 불운국, 불사분야국, 원지국, 건마국, 초리국 등 모두 50여 개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만 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 호(戶)수가 총 십여 만이다. 진왕(辰王)이 월지국(=목지국)을 다스리는데 신지(臣智)를 때로 우대하여 호칭하였고(加優呼) 신운국(신운신국)의 견지(遣支) 보(報), 안야국(변진안야국)의 축지(支), 분신리아국의 불례(不例), 구야국(변진구야국)의 진지(秦支) 염(廉)이 그것이다. 그 관직으로는 위솔선 읍군(魏率善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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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 중 동이열(東夷列傳)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爲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爲界,朝鮮遂弱.及秦幷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爲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反,入匈奴,燕人衛滿亡命,爲胡服,東度浿水,詣準降,說準求居西界,(故)中國亡命爲朝鮮藩。準信寵之,拜爲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衆稍多,乃詐遣人告準,言漢兵十道至,求入宿衛,遂還攻準。準與滿戰,不敵也。】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魏略曰 初,右渠未破時,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至王莽地皇時,廉斯爲辰韓右渠帥,聞樂浪土地美,人民饒樂,亡欲來降。出其邑落,見田中驅雀男子一人,其語非韓人。問之,男子曰:「我等漢人,名戶來,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爲韓所擊得,皆斷髮爲奴,積三年矣。」曰:「我當降漢樂浪,汝欲去不?」戶來曰:「可。」(辰)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縣言郡,郡卽以爲譯,從芩中乘大船入辰韓,逆取戶來。降伴輩尙得千人,其五百人已死。時曉謂辰韓:「汝還五百人。若不者,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辰韓曰:「五百人已死,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弁韓布萬五千匹,收取直還。郡表功義,賜冠、田宅,子孫數世,至安帝延光四年時,故受復除。


기자조선의 조선후 준(準)이 왕을 참칭한 후 연나라 망명인 위만에게 공격당해 왕위를 탈취당했다.【위략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쇠망하여 연나라가 왕을 자칭하고 동쪽 땅을 경략하려 하자,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 또한 왕을 자칭하고는 군사를 일으켜 역으로 연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려 했다. 대부(大夫) 예(禮)가 이를 간언하자 그만 두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자 연나라도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사나워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이천여리 땅을 탈취하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고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 진나라가 천하를 아우르자 몽념(蒙恬)을 보내 요동에 이르는 장성을 쌓게 했다. 그때 조선왕 부(否)가 즉위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해 대략 진나라에 복속했으나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했다. 부가 죽자 그 아들인 준(準)이 즉위했다. 20여 년 후 진승, 항량이 봉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했고 점점 준에게로 달아나 망명하자 준은 그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나라가 노관(盧을 연왕(燕王)으로 임명했을 때 조선과 연은 패수(浿水)를 그 경계로 삼았다.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에 투항했을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했는데 호복(胡服)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나아가 투항했고, 서쪽 경계에 거처하게 해달라고 준을 설득하여 중국의 망명인들을 수습하여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었다. 준은 위만을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임명(博士)하고 규(圭)를 하사하여 100리 땅을 봉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했다.


위만이 망명인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보내 한나라 병사가 10갈래 길로 쳐들어왔다고 거짓으로 고하며 (수도로) 들어가 숙위할 것을 청했는데 마침내 군을 돌려 준을 공격했다. 준은 위만과 싸웠으나 감당하지 못했다.】좌우 측근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 거처하게 되었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불렀다.【위략에 이르기를 준의 아들과 부모는 조선에 머물렀는데 성을 바꿔 한씨(韓氏)라 했다. 준왕이 바다 가운데 있을 때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후 절멸(絶滅)했으나 지금 한인(韓人)들 중에는 여전히 그를 받들어 제사 지내는 자가 있다.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하게 되어 사시(四時)로 조알(朝謁)했다.【위략에 이르기를 당초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간언했으나 수용하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는데 이때 따라 나온 자가 2천 여 호(戶)였고 또한 조선과 공번(조공을 바치고 사신이 오고 감)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 지황(地皇)에, 염사치(廉斯)가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었는데 낙랑 토지가 비옥하고 인민들이 풍요하다는 말을 듣고 망명하여 투항하고자 했다.


그 읍락을 나왔다가 밭 가운데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남자 한 명을 보았는데 그 말이 한인(韓人)이 아니었다. 그에게 묻자 그 남자가 말했다, "저는 한인(漢人)이고 이름은 호래(戶來)입니다. 저희 일행 천 오백 명이 벌목하다 한인(韓所)에게 사로잡혀 머리를 깎이고 노비가 된지 3년 째입니다." 염사치가 말했다, "나는 한나라 낙랑에 투항하려 하는데 너도 함께 가겠는가?" 호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염사치가 호래를 데리고 함자현(含資縣)에 도착하니 현(縣)에서는 이를 군(郡)에 보고했다. 군에서는 즉시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에서 큰 배를 타고 진한으로 들어갔는데 호래도 함께 따라갔다.


항복한 동료 천 명을 되찾았으나 5백 명은 이미 죽은 뒤였다. 염사치가 깨우쳐 말했다, "5백 명을 돌려보내시오. 만일 그러지 않으면 낙랑이 마땅히 군사 만 명을 배에 태워 보내 당신들을 공격할 것이오." 진한 사람이 말했다, " 5백 명이 이미 죽었으니 다른 것으로 속죄하겠소" 이에 진한에서 만 오천 명, 변한에서 포(布) 만 오천 필이 나오자 염사치가 이를 거둬 돌아왔다. 군에서 염사치의 공의(功義)를 표창하여 관책을 하사하고 자손 수 대에 걸쳐 안제(安帝) 연광(延光) 4년(125년)에 이르기까지 과역을 면제받았다(復除)



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下戶詣郡朝謁,皆假衣,自服印綬衣千有餘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其俗少綱紀,國邑雖有主帥,邑落雜居,不能善相制御。無拜之禮。居處作草屋土室,形如,其戶在上,擧家共在中,無長幼男女之別. 其葬有槨無棺,不知乘牛馬,牛馬盡於送死。以瓔珠爲財寶,或以綴衣爲飾,或以縣頸垂耳,不以金銀錦繡爲珍。其人性彊勇,魁頭露紒 如炅兵,衣布袍,足履革。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諸年少勇健者,皆鑿脊皮,以大繩貫之,又以丈許木之,通日呼作力,不以爲痛,以勸作,且以爲健。常以五月下種訖,祭鬼神,群聚歌舞,飮酒晝夜無休。其舞,數十人俱起相隨,踏地低,手足相應,節奏有似鐸舞.十月農功畢,亦復如之。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之爲蘇塗。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而所行善惡有異。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無他珍寶。禽獸草木略與中國同。出大栗,大如梨。又出細尾鷄,其尾皆長五尺餘。其男子時時有文身。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猪。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市買韓中。


환제(한나라 11대 황제: 146년~168년), 영제(12대 황제: 168년~ 189년) 말에 한(韓),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이 이를 제압하지 못하자 백성들 다수가 한국(韓國)으로 유입(流入)했다. 건안(建安: 196년 ~ 220년) 중,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을 나눠 남쪽 거친 땅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해 유민(遺民)을 수습하여 병사와 더불어 한, 예를 토벌하니 예전 백성들이 점점 (한, 예로부터) 나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왜(倭), 한(韓)은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景初:237년 ~ 239년) 중에 명제는 은밀히 대방태수 유흔(劉昕),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2군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신지의) 아래 군장들에게는 읍장(邑長)을 가사(加賜)했다. 그 풍속이 의책을 좋아하는데 하호(下戶)들도 군으로 나아가 조알하여 모두 의책을 빌리니 스스로 인수와 의책을 갖춘 자가 천 여 명이나 되었다.

(유주)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본래 낙랑이 한국(韓國)을 통치했다 하여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이려 했는데 관리가 통역하여 전하는 과정에 잘못이 있어 신지가 격분하여 한(韓)이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을 일으켜 토벌했는데 궁준이 전사했으나 2군(낙랑, 대방)이 마침내 한을 토멸했다. 그 풍속에 기강이 부족해 국읍(國邑)에 비록 우두머리(主帥)가 있으나 읍락에 잡거(雜居)하여 서로 제어하지 못하고 궤배(拜)의 예법이 없다. 초옥토실(草屋土室)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형태가 무덤과 같고 문을 위로 내는데 모든 가족이 그 안에 함께 거주하여 장유(長幼)나 남녀의 구별이 없다. 장례를 치를 때 곽(槨)은 있으나 관(棺)은 없다. 우마(牛馬)를 탈 줄 모르고 장례를 치를 때 우마를 함께 묻는다. 영주(瓔珠)를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거나 목과 귀에 걸기도 하지만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인성(人性)이 강용(彊勇)하고 상투를 트는데 그 모습이 경병(炅兵)과 같다. 베로 만든 두루마기(布袍)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여러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을 꿰고 또 1장(丈) 정도되는 나무를 매달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다하여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데 작업을 독려하며 또한 이를 강건함으로 여긴다. 항상 5월이 되어 씨 뿌리기를 끝내면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무리지어 모여 음주, 가무하는데 밤낮으로 그침이 없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땅을 얕게 또는 높게 밟고 손발로 서로 호응하며 가락이 있는데 탁무(鐸舞)와 유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한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어 국읍에 각각 한 명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니 그를 천군(天君)이라 한다. 또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別邑)을 두고 이를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여러 도망자가 여기에 이르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으니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 비슷한 점이 있으나 선, 악을 행하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그 북쪽에 군(郡)과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다소 예속(禮俗)에 밝았으나 멀리 떨어진 곳에선 죄수처럼 노비가 서로 모여 산다. 다른 보물은 없다. 짐승, 초목은 중국과 같다. 큰 밤(大栗)이 산출되는데 크기가 배(梨)만 하고, 또 꼬리가 가느다란 닭(細尾鷄)이 있는데 그 꼬리 길이가 5척 남짓 된다. 남자는 늘 문신(文身)을 한다. 또 주호(州胡)가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소 몸집이 작고 언어가 한(韓)과 다르다.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깎고 가죽옷을 입는데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은 윗도리는 있으나 아랫도리가 없으니 대략 알몸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과 교역한다.    
     
     
     
     
     
     
     
     
     
     
     
     
     
     
     
     


출처 : "세미신선의 반도원(蟠桃園)의 꿈..
글쓴이 : 세미신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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